2021

“취하하세요.”

winter_inspired 2021. 6. 4. 23:58

빛나는 순간은 그 당시 주변이 어두웠을수록 기억엔 더 강렬히 남는듯. 넉넉하지 않던 우리집에 그나마 남의 집보다 많은 게 책이었지만 나는 책을 잘 안 읽었다. 대신 책꽂이에 꽂힌 책들과 저자 이름들만 잘 안다. 책을 읽고 남는 게 있었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대신 그 빼곡한 책들이 가리키는 방향 또한 유산이 될 수 있다면, 그럴수도 있겠다. 젊었을 때 부모님이 읽던 낡은 책들은 오래된 종이 냄새를 풍기며 이집 저집을 거치면서도 아직 건재하다. 어떤 계기였을지 부모님은 신앙심을 유지하면서 진보적인 생각들을 좋아했다. 부모님이 대단한 행동을 해온 건 아닌데 여튼 심성이 독특하리만치 선량한 구석이 있다는 게 다 큰 딸의 평가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학교에 사단이 났다. 교장과 이사장이 전교조 교사 두명을 해임하는 바람에 긴 투쟁이 시작되었다. 학교가 ‘명문’이 되길 바랐던 신입생 다수는 재단 쪽 편을 들었는데, 내 안에 심겨진 반골기질이 이때부터 활동을 시작했는지 나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당연히 전교조 편을 들었다. 분위기는 점점 심각해져 갔다. 수업 손실 등 신입생들 사이에서 여러 불만이 터져나오다 그 부모들은 해직 교사들(혹은 전교조)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집 옆엔 고교 3년 내내 나와 등하교를 함께 하던, 목사 아버지를 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의 어머니도 소송에 참여한다고 했다. 그때 최악의 불경기를 겪던 우리 부모님은 학부모 모임에 가는 일이 절대 없었는데, 학교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찮았는지 어느날은 엄마가 학교에 가 선생님을 만나고 왔다. 자초지종은 기억이 안 나지만 엄마는 나한테서 그 아이네 엄마가 소송에 참여했다는 말을 듣고 정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통화를 해 설득을 하겠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서 물어봤다. “뭐라고 했어?” 엄만 미간을 찌푸리더니 “ㅇㅇ엄마, 취하하세요”라고 했단다. 부연한 이유는 ‘믿는 사람들로서’ 내 손해 때문에 억울한 사람을 소송으로 곤경에 빠뜨려서야 되겠는가. 그 다음날 친구가 말했다. “우리 엄마가 너네 엄마 되게 똑똑하시다던데?”
그 이후로 아직도 “고소 취하”란 단어만 들으면 쿨했던 엄마가 떠오른다. 시절은 암흑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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