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s out buns out 22-23 5

호주에서 본 영화들

호주에서 총 다섯 번 극장에 갔다.처음은 K사에서 갓 근무를 시작했던 8월, 탑건 매버릭이 아직 극장에 걸려있을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호주에서 영화관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데 (사실 뭐에도 욕구가 별로 없었던 시기)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H과장님이 갑자기 저녁에 뭐하냐면서 급 탑건 관람 모임이 결성됐다. H과장님, 나랑 같이 일을 시작한 L신입, 이제는 너무 애틋한 내 호주 황언니까지 총 네명. H과장님은 "자막 없이 보는 건 아직도 저도 challenging해요"라고 했는데, 영화가 탑건이니 망정이지 와 자막 없으니 정말 못 알아듣겠더라. 헝그리잭스에서 햄버거 묵고 (호주에서 10년 산 H과장님은 그날 헝그리잭스 처음 먹어보신다고) 간 타운홀 근처의 이벤트시네마. 거기에서 희대의 ..

그리운 그 길, 출근길

오늘은 한국에서의 첫 출근날이었다. 구직을 하면서 서울만 아니었음 좋겠다! 했는데 일산에서 일하게 됐다. ^_ㅠ 광화문? 강남? 성수? 마포? 어떤 분위기일지 훤히 보이는 그곳들의 그 어떤 곳에서도 일하고 싶지 않았다. 뭐 와중에 잘 됐긴 한데 출퇴근길에 나는 아직도 전혀 마음 못 잡고 있다는 걸 더 선명히 느꼈다. 무수한 식당과 현란한 간판들, 그 앞에 배출된 쓰레기 더미들… 그저 이 지역에 정 붙이기 어렵겠다 싶기만 하다. 하버브릿지를 건너 오페라하우스를 바라보던 내 출근길. 봐도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들, 출근길이 행복할 수 있다는 충격. 그때, 나는 이걸 무척 그리워하겠구나란 사실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인생에 두 번 없을 시간이라는 것도. 마음이 아플 줄은 알고 있었지. 근데 생각보다..

모타운의 발라드, 그리고 본다이의 기분을 찾아다니는 습관

1년 반 호주 생활의 하이라이트는 본다이 비치에서의 6주였다. 그리고 그 6주 동안 가장 잘한 것 한 가지는 내내 모타운 노래들을 들은 것이다. 본다이 생활에 너무 잘 맞는 배경음악이면서, 회색 건물에서 시름시름할 때도 내 눈앞에 본다이 풍경을 촤라락 펼쳐주는 어딘가 애달픈 보물상자가 되었다. 이제는 조금 아껴들어야겠다는 생각인데, 이 카테고리를 만들고 처음 글을 적으면서 본다이를 오롯이 떠올리고 싶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스모키로빈슨&미라클스의 the tracks of my tears를 들었다. 그날 오후는 조금 울적했는데, 카페를 나와 후덥지근한 동네 어귀 회색 건물(우울 포인트가 확실해…)을 보며 난 다시 본다이에 갈수 없다는 생각에 또 눈물이 맺혔다. 그러다 얼마전 기똥찬 발견이었던 이 곡의 보이즈..

그 사람이 남긴 것들

내 인생에서 역대급으로 잘 맞는 남자를 호주에서 만났다. 여러 번의 데이트는 꿈만 같았고 그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얼추 잘 맞을 거란 생각은 들었는데, 이렇게 좋은 사람이었다니! 게다가 알면 알수록 나와 잘 맞잖아? 아름다운 해변에서 그 사람과 만나던 시간은 꿈만 같았다고 밖에 표현이 안 된다. 하지만 그는 내게 커다란 트라우마를 남기고 떠났다. 만날 땐 그렇게 다정한데, 만나지 않을 때 차가웠던 사람. 함께 보낸 멋진 시간에 취해 헤롱거리던 내가 그 간극을 받아들일리 만무했다. 그는 결국 차가운 모습으로 끝을 알렸고, 나는 상처 투성이가 되어 이미 이사가 확정된 본다이에 왔다. 그 사람과 아주 눈부신 시간을 보냈던 그곳으로. 트라우마가 더 깊어질까 겁을 집어먹은 채 시작한 본다이 생활이었다. 그곳에 치..

프롤로그 - '본다이비치 네이버후드'

한국에 돌아와 3주를 보내고 오늘로 4주차를 맞았다. 연인과 헤어진 사람처럼 본다이를 생각하면 아직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묵직한 그리움이 몰려 온다. 무슨 평생 그곳에 살았던 사람도 아닌데 고향이 그리워 새로운 곳에 마음을 못 붙이는 사람 마냥, 이걸 봐도 저걸 봐도 시시하고 재미가 없다. 취업이 결정된 날, 본다이를 여행하고 있는 분께 사진 한 장을 받았고 엄마의 눈을 피해 눈물을 닦아야 했다는. 이 정도면 중증이다. 아바타의 교감 촉수 같은 것이 내 머리부터 본다이 비치에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아직 마음이 거기 있다는 말이 비유가 아닐 수 있다. 돈도 떨어졌겠다, 원하는 분야에다가, 이정도면 나쁘지 않다 싶은 지역으로 취직이 되었건만, 나는 기쁘지 않았다. 새로운 챕터가 열리자, 비로소 본다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