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서 총 다섯 번 극장에 갔다.
처음은 K사에서 갓 근무를 시작했던 8월, 탑건 매버릭이 아직 극장에 걸려있을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호주에서 영화관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데 (사실 뭐에도 욕구가 별로 없었던 시기)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H과장님이 갑자기 저녁에 뭐하냐면서 급 탑건 관람 모임이 결성됐다. H과장님, 나랑 같이 일을 시작한 L신입, 이제는 너무 애틋한 내 호주 황언니까지 총 네명. H과장님은 "자막 없이 보는 건 아직도 저도 challenging해요"라고 했는데, 영화가 탑건이니 망정이지 와 자막 없으니 정말 못 알아듣겠더라. 헝그리잭스에서 햄버거 묵고 (호주에서 10년 산 H과장님은 그날 헝그리잭스 처음 먹어보신다고) 간 타운홀 근처의 이벤트시네마. 거기에서 희대의 해변가 배구 씬을 보았고, 없는 향수를 느꼈고, 황언니는 마일스 텔러가 좋다고 했다.
친구들이 떠나고 호주에서 혼자 아주 잘 지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즈음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외롭지도 않고 정말 괜찮은데 (정말이다) 이 서구권 명절에 처량하게 보이기 딱 좋겠다 싶은 ^_ㅠ... 가족 단위의 교회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도 않아서 영화를 예매했다! 상점들이 문을 닫아도 영화관이 열려 있었고, 손님도 얼마 없는 그곳에서 일하는 알바생은 물론 이민자/유학생들. 그렇게 24일에는 휘트니 휴스턴 전기 영화인 I wanna dance with somebody를 맥센에서, 25일에는 아바타:물의길을 봤다. 흠 둘다 인상적이지 않았다. (두번째 영화가 아바타였던 것을 지금 한참 떠올림) 특히 휘트니 휴스턴 영화가 참 궁금했는데, 왜 '마일스'나 '본투비블루' 같은 영화가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공연 장면은 좋다는데, 나는 작위적으로 느껴졌어.
다음 영화 기행은 바로 2023년 6월에 열린 시드니영화제. 우리 호주언니에게 영화제 소식을 알리고 적극적인 호응을 바탕으로 초청작이었던 '패스트라이브즈' 두 장을 호기롭게 예매를 했는데. 전날 호주언니가 아프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다... 나는 그때 좋아하던 남자애한테 같이 가자고 했는데, 이제 보니 무례했던 걔는 확답을 못하더니 막판에 어렵다 하였고, 나는 티켓 하나를 얼른 다른 영화로 바꿔, '거미집'까지 보게 되었다는 것. 둘다 한국 개봉 전이었던 데다, 명성은 많이 들었었고, 아름다운 State Theatre에서, 거미집은 감독님 무대인사까지. 그런데 솔직한 소감은, 난 패스트라이브즈에 몰입을 못했다는 것...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재질의 영화인데... 다들 좋아하는데 나는 왜... 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던. 거미집은 정말 재밌었어. 두 영화를 관람하기까지, 마음은 좋지 않았으나 결국은 아주 훌륭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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