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학생이라 하기엔, ‘너무 자주 학생’이다.
‘너무 자주 학생’의 학기 두 번째 주. 주말 아침, 백건우 피아니스트의 쇼팽을 귀에 꼽고 캠퍼스에 도착해 강의실 가는 기분이 너무 산뜻했다. 길고 긴 수업은 내내 너무 즐거웠다. 원래 전공인 미디어 문화연구는 언제나 내 근간이 되겠지만, 통번역수업이 주는 즐거움을 뭐라 표현할지 모르겠다. 나 쫌 물 만난 고기였던 거 같은데 (아님) 아직 이주차라 암것도 모른다. 원래 목표대로 과제 안 빼먹고 수업에 안 늦고 안 빠지면 나한테 잘했다고 칭찬할 것이다.
오늘 받은 자극 두 가지가 있다. 한 선생님은 책과 아카데믹 라이팅을 많이 읽으라고 강조한다. 다른 한 선생님은 이론을 열심히 가르친다.
글을 많이 읽기, 그리고 이론을 배우는 것. 언뜻 즉각적인 성과로 드러나는 게 아닌 것들은 성격 급한 우리들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저걸 배워서 어따 언제 써먹는가) 그치만 한 전문인으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dignity는 꼭 저런 것들이 만들어준다.
먼저 글을 읽으라는 조언에 대해. 한 자 한 자 꼭꼭 잘 씹어먹고 삼키고 소화하는 사람이 되고싶단 염원에 불을 지핀다. 불안함과 멍청함에 글이 안 읽혀 난독증이 의심되어 정신과에 가볼까 생각했던 나의 지난 시간들과 이제 진짜 헤어지자. 단지 기술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박식한 기술자가 되고 싶다.
이론 수업에 대해. 이론의 역할은 초심자에겐 기초를 만드는 것일 수도 있으나 학자들에겐 끊임없이 뿌리와 정체성을 확인하는 도구 아닌가. 내가 하는 이 영역의 모든 일은 뜨내기짓이 아닌, 꽤 대단한 근본과 근거가 뒤를 봐주는 일이라는 것. 그 모든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는 것들에 형체를 만든 게 담론. 그 생각의 형태를 이론으로 만든 선구자들의 열정에 감동이.
종종 나는 장차 하게 될 연구 주제를 떠올릴 때가 있는데(대부분 헛짓일 것이다, 여튼) 우리나라 대중문화에 탈식민성이 어떻게 숨어있는지 발견해보는 것이다. 이걸 생각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아일랜드의 가수 크랜베리스 노래를 듣다가다. 보컬 돌로레스 오리어던의 부고에 슬퍼하던 어느 날,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숙명적 우울함이 그녀의 인생, 크랜베리스 노래 중심에 있지 않았을까 다소 감성적으로 생각이 이르렀다. 한국은 우리나라니까 오히려 너무 자연스러워서 미처 생각 못한 걸 낯선 아일랜드의 가수를 통해 생각하게 된 것이다. 과연 그런 게 있을지, 그리고 아일랜드-한국 단순비교는 절대 불가하겠지만 아무튼 조금 흥미가 생기던. 그런데 때마침 오늘 이론 수업 가르치신 엄청 멋진 교수님이 본인의 최근 연구를 소개하는데, 일제시대 우리나라에 들어 온 아일랜드 작품 번역에 대해 연구하셨다는 게 아님! 그때부터 내 눈은 다시 초롱초롱. 공부 의지에 불이 지펴진 또 다른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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