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I choose love

winter_inspired 2022. 2. 27. 18:45

호주에 온지 열 하루가 지났다. 처음 며칠 쨍쨍하고 맑아, 역시 호주, 하던 것도 잠시. 비가 주룩주룩도 아니고 우쾅쾅 쏟아져 한 일주째 춥고 습하다. 앞으로도 쭉 비 예보가 뜨건만 오늘은 어째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이런 날 나가줘야 하는데, 그런데.

자가격리 이틀 차. 엄밀히 어제 늦은 밤부터니, 하루 정도 지났다. 집을 공유하는 분이 감기 기운이 있어 자가진단 키트로 검사를 했더니, 검사 결과 두 줄이 떠버린 것이다. 나는 음성이 나왔지만 빼박 밀접 접촉자로 함께 일주일을 격리해야 한다. 마지막 외출이 되어버린 어제는 비 개인 동네 정취를 맘껏 누리며 신나게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왔다. 귀에는 윱 베빙의 고품격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이젠 적응이 되어간다는 긍정적 마음이 샘솟아 속으로 마침 호주에서의 두 가지 셀프 금지어도 정했다. “귀찮아” & “짜증나”

엄마랑 전화통화 하며 “짜증나”라고 말하려다 집어 넣었다. 좋게 생각하려고. 공부도 많이 할 수 있고, 돈도 안 쓰고, 접어 둔 묵상도 하고. 정말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오늘 나 혼자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유신부님의 설교를 들었다. 자꾸 말씀을 표면적으로만 보고 있는 게 요즘 딱 하느님에 대한 내 태도인데, 그 속을 깊게 들여다 보는 설교에 큰 도움을 받았다. 아, 이런 이야기를 정말 듣고 싶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구절로 유명한 누가복음 6장.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 주고 누가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고 하지 마라.” 단지 예수님이 자극적인 화법을 사용하는 본문이라는 생각, 그러니 적당히 ‘원수까지 사랑하도록 노력해야지’하고 나이브하게 결론 내리는 우리의 흔한 행태를 짚은 후, 이건 근본적인 이야기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에 만연한 악,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 조차 그 악에 가담자가 되어 버리고 마는 현실 속에서, 악의 질서를 끊어내는 아주 근본적인 선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걸 가능하게 하는 건 사랑이다. 이 불가능해 보이는 걸 가능하게 하는 건 사랑… 그리고 사랑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자체가 사랑이시다. 원수를 사랑하는 건 평생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치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건 가능할 뿐더러, 그게 바로 내 할일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건 나의 현실이자 단 하나의 궁극적인 소망이다.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이 전복적인 메시지는 어쩌면 가능해지는 것이다.

설교를 듣고 나서, 내가 고3 무렵 자주 듣던 영어 찬양이 하나 떠올라 틀어보았다. I will choose Christ로 시작하는 노래인데, 기억하지 못했던 두 번째 소절이 (어머) I will choose love다. 그 뒤의 가사도 자꾸 곱씹게 된다. I give my heart, I give my life, I give my all to You. 이렇게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가 전복적일 수가. Teach my heart and teach my soul, 바로 오늘의 내 기도다. 어리석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기 원하니, 내 마음과 영혼을 가르쳐 주세요.

p.s.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원수는 절대 아니지만 저쪽 방에서 격리하는 분과 내가 한국에서 챙겨 온 음식을 나누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상황에서는 ‘각자도생’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반성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실천이라곤, 결심이라곤 이토록 무지무지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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