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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미 덴크 칼럼 : 피아노 맨

winter_inspired 2019. 6. 26. 00:51

(헉. 너무 젊을 때 사진.. 출처는 -> https://www.newsweek.com/pianist-jeremy-denks-favorite-mistake-ditching-science-64897)

피아니스트 제레미 덴크(Jeremy Denk)가 2013년 10월 14일 발행된 뉴요커지(The New Yorker)에 기고한 글 'Piano Man'을 번역한 것임. (원문 링크: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13/10/14/piano-man-2)

뜻밖의 행운이 따라 생활고에서 처음 벗어난 적이 있다. 런던에서 열린 콩쿨에서 3위에 입상한 것이다. 대학원 시절 탐닉하던 것들(술, 중국집 포장음식, 부엌 살림도구 등)이 남긴 4천5백만 달러의 카드빚이 단숨에 극복되었다. 수상의 모든 영광과 수개월의 노력이 내게 안겨준 것은 다름아닌 다이애나 왕세자비와의 사진이었다. 로열 페스티벌 홀의 시상대에서 나를 잡고 있는 있는 다이애나비와의 사진을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보냈다. 당시 내 헤어스타일은 다이애나비와 닮아있었다.

이 구사일생의 경험에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나는 어쩌다 모차르트에 대한 내 고고한 생각을 현금화 할 수 있었는가. 일년도 안 되어 나는 새로운 스승을 찾아 본격적인 커리어를 쌓기 위해 중서부를 떠나 뉴욕으로 향했다. 처음 몇 달간의 뉴욕 생활은 극심한 생활고와 지독한 향수병의 정점을 찍었다. 높은 물가가 물건들을 볼모로 잡아 당최 살 수가 없었다. 사용할 수 있는 돈은 일체 없었다. 줄리어드 공연 사무실에 빌붙어서 연명(?)했고, 예식장과 파티장 아르바이트를 다니며 요구사항에 따라 진땀을 빼며 건반을 두드렸다. 술 취한 신랑들, 사교계 여성들, 갓 변호사가 된 이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일을 해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어느 날 훌륭한 음악가이자 일본계 모델 에이전시에서 일하게 된 친구 두 명이 내게 제안을 해왔다. 그들의 업체에서 '뉴욕의 사계절'을 테마로 두 장의 DVD를 출시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클래식 앨범이어야 하며, 친구들이 주장하기론 뉴욕을 테마로 한, 양귀비가 흩뿌려진 느낌의 음악이어야 했다. 나의 소속사(agent)에서는 경고 싸인을 보냈지만, '일본 업체'라는 단어가 풍기는 왠지 모를 '두둑한 정산'의 느낌을 뿌리치기 어려웠다. 그 유명한 루빈스타인과 작업한 전설의 맥스 윌콕스가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있다니, 나로서는 더 확인해 볼 필요도 없는 제안이었다.

우리는 업체 대표와 관련자들 앞에서 오디션을 보았다. 대표는 내가 "귀여운 것 같다"고 말했고, 프로젝트의 조짐은 좋아보였다. 우리는 부지런히 멘델스존 D단조 삼중주와 함께 유명한 몇 곡을 리허설했고, 녹음을 하러 프린스턴으로 향했다. "Take the 'A' Train"을 정확히 해석했는지 의구심이 들고, 피아졸라는 너무 앵글로색슨스러웠지만 아무렴 어떤가. 나는 급여를 받는 녹음 아티스트가 되었다.

그때까지 내 영혼은 아직 멀쩡했다. 영상제작에 들어가기 전까지. 매일 집 앞으로 차가 도착해 뉴욕의 관광 가치를 드높이는 명소로 우리를 데려갔다. 메이크업 담당자, 수많은 일본인 카메라맨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내가 마치 중요하고, 재능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고, 카메라가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모든 장면을 구성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기는 힘들었다. 나는 단지 피아노 앞에 있는 한 무더기의 금발머리였던 것. 몇날몇일 이미 녹음된 트랙을 따라 연주하던 우리는 마리오네뜨와 같았다.

촬영 장소들은 점점 악회되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지금은 사라진 크리스마스 폭동을 피해 센트럴 파크의 '테이번 온더 그린' 레스토랑에서 촬영되었다. 나는 "도시에 대하여" 부분을 촬영할 때 걸린 감기가 낫지 않은 상태였다. 업무시간 외에 일을 해서는 안 됐지만 그땐 이미 새벽 세시였다. 모든 체력이 소진되었고, 기침과 콧물은 멈출 줄 몰랐다. 음식 테이블 주변을 맴돌며 기름진 새우 크래커를 집어다가 입안 한가득 채웠다. 이따금씩 세트장으로 불려가면 계절의 충만한 감성을 연기하는 것이다. 난 지금껏 무엇을 한 걸까? 음악학 수업에서, 바흐의 프렐류드와 푸가를 갈고닦던 수많은 시간이 내게 남긴 게 뭐였지?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버드랜드' 바로 불려갔다. 지난 밤의 칵테일 냄새가 여전했다. 가발을 쓴 입담꾼 한 명이 이 바의 찬란했던 때를 이야기해주었다. 덕분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날 우리의 "Take the 'A' Train" 연주를 떠올리면 우린 영영 버드랜드에서 금지되었어야 마땅하다.

아직 클라이막스가 남았다. "뉴욕, 뉴욕". 뉴저지의 리버티 스테이트 파크에 도착해 리무진에서 내렸을 때, 해안가에 오롯이 서있는 순수한 피아노를 나는 보았다. 피아노를 둘러싼 거대한 장비들은 녹음된 내 연주가 영원히 남아서 대량 생산되고 해외로 팔릴 것이라는 불쾌한 기분을 들게 했다. 하필 또 바람이 많이 불었고, 음악과 머리카락이 주체되지 않아 촬영은 지체되었다. 실로 운명은 이것을 받아들이길 원했나보다. 카메라가 돌자, 믿을 수 없게도 때마침 헬리콥터가 도착해 카메라는 스카이라인 반대로 우리를 잡았다. 내가 살던 작은 마을의 블루스를 떠올려 보았다. 내가 뉴욕에 온 이유가 어느정도는 돈을 벌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지금 나는 여기에 왔고, 욕조에서 목욕하고 "뉴욕, 뉴욕"을 연주하고 있다. 위선적으로 체면을 구긴 덕에 꽤 많은 액수가 들어왔다. 꼭 물어보고 싶다면, 한 계절 당 250달러씩 총 천 달러를 벌었다. 수수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