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울고 웃은 19년 1월의 예수원

winter_inspired 2019. 1. 30. 10:03


험준한 산이 예쁜, 강원도를 굽이굽이 기차가 달린다. 예수원에 다시 오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가 내 마음에 가득한 청량리 가는 기차 안. 싸이월드를 확인하니 첫 방문이 2012년 이맘 때였다. 코 시렸던 기억만 같을 뿐 돌아오는 길이 7년 전 그때보다 열배는 더 기쁘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한다는 내 확실한 바람과 그것만은 아주 기뻐하시는 주님께서 내 바람을 이루어주셨다. 그젯밤에 기도를 마치고 본 밤 하늘, 침엽수 위로 빽빽하게 뜬 별들이 한동안 그리울텐데 어쩌면 좋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무수한 별을 보고 약속하실 때, 그건 정말 숨 멎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이번 예수원의 짧은 여정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내 온갖 부정적인 마음이 기쁨으로 갈아 끼워졌다는 것. 길게 늘어뜨린다면, 바로 이것이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것들이다:

중보기도 시간에 노동자를 위해 기도했다. 험한 노동에 비해 제대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 이주노동자에게 아무도 원하지 않는 일을 맡기는 부조리, 위험에 쉽게 노출되어 있는 노동자, 세계 부호 25명이 35억 인구의 부를 소유한 비정상적인 부의 편중 등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다. 모든 상황이 마음에 사무치지만, 흔히 “이주를 환영하자”는 진보주의자 속에서 때로 이주노동자들을 “인구절벽 시대에서 환영해야 할 노동, 출산 인구”를 위한 도구로 - 그들의 말로는 ‘대안’으로 - 떠드는 태도에 화가 나 있던 터였다.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었다니. 그동안 나는 얼마나 기도에 무심했나. 세상 불의에 쉽게 분노하는 걸로 마음 보탰다고 생각한 나의 오만함은 어디서 나왔나. 아무도 기도하지 않을 것 같은 일에 끊임없이 기도를 이어가는 사람들은 기도의 힘을 전혀 의지하지 않고 있던 내 믿음의 민낯을 비춘다.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게 주요 사역인 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매일매일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할 것이다. 중보기도 시간은 예수원이 내게 준 큰 선물이다.

‘노동자’의 딸인 나에게 베푸신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했다. 그날의 시편 말씀은 내게 큰 위로를 주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웠나니” 그동안 부정하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았는가. 그치만 나는 그 시간 속에서 주님이 누구의 편에 서시는지를 확실히 보았다. 주님은 때때로 무력함의 모습을 하고 우리 인간들을 실망시킨다. 주님은 도대체 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실까. 하지만 헨리 나우웬은 “하나님은 권력의 환상을 폭로하시기 위해, 세상을 지배하는 어둠을 물리치시기 위해, 그리고 분열된 인류에게 새로운 연합을 가져다 주시기 위해, 무력한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핵심을 형성한다.” 나는 오랫동안 궁금했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나인데 왜 하나님의 임재가 사회의 어둡고 소망없는 상황 가운데서 내게 뚜렷이 나타나는지를. 이건 내 상처와 억화심정이나 자기연민인 것은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내 시선을 거기서 거두지 않는 것이 순종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나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곳에 있을 거란 걸 안다. 무수한 사람에게 무수한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 내게는 사회가 만든 아픔에 민감하도록 이끄시는 것이 너무 확실하다. 내 상처가 고난이었다면, 나는 그것을 통해 주의 율례를 배웠다. 결코 지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무력함은 그 무력함에 마냥 머물 핑계나 낭만적 묘사꺼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헨리 나우웬은 말한다. “우리가 연약함에 사로잡힐 때에만 세상의 권력에 사로잡히는 것을 피할 수 있다면, 하나님 편보다는 오히려 사단의 편에 있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이는 오히려 권력의 탐욕에 의해 이용 당하는 것이다. 오히려 무력함, 연약함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 인간들에게 신적인 능력을 주셔서 고개를 들고 자신감 있게 이 땅을 걸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무력함과 연약함에 끌려다니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이번에 읽은 말씀에도 “우리는 여러분이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정도로 제대로 살기를 바라고, 빈둥거리며 친구들에게 빌붙어 사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2, 메시지성경) 그래서 나는 내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하였다. 특히 새로 시작한 공부에 최선을 다해서 괜찮은 기술자가 될 것이다. 내가 권력에 의해 나를 규정짓지 않을테니, 가난하게 살겠다거나 부자로 살겠다는 이상한 목표는 필요가 없어진다. 내 기술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것도 때론 내 오만일지 모른다. 그저 성실하게 일하여 남에게 폐 끼치지 않을 정도로 돈을 벌고, 내 안에 권력의 문화가 물들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균열을 내야 할 때 마땅한 용기를 주시도록 구하는 것. 그것이 계속 노동을 하게 될 내가 가장 원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일일 것 같다.

대학생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했다. 누군가 이 기도제목을 냈을 때는 나와 매우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왜 한 마디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치만 그 이유는 분명했다. 지난 대학 시절동안 주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해 주셨나를 생각하면, 지금껏 별다른 기도도 하지 않은 게 얌체였던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내게 좋은 공동체와 인도자를 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내 신앙의 방향성은 이 공동체로 인해 단단해졌고, 그것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절대 깨지지 않을 것이란 사실은 점점 확실해진다. 대학생들이 불안하고 암울한 시간을 지날 때, 하나님이 주신 안전한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길 기도했다. 하나님을 받아들인 그들은 당장은 아무 능력도 없어 보이지만,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꿀 힘은 그들의 선한 마음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간사님께 감사하다고 연락을 드렸다. 정말 뜬금포였지만, 그건 진짜다. 사랑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호의는 늘 나를 기다려주고 편들어 주었다. 내가 어찌 잊겠는지.

내게 헨리 나우웬의 의미는 무엇일까. 헨리 나우웬의 책을 읽으면 나는 그가 말하기 위하여 온 몸과 마음을 다 쓰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가 하는 말은 여러가지 다양하게 요약할 수 있겠지만, 결국 온 힘을 다해 말하는 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확실한 실제인지가 아닐까. 내 한낱 알량함으로 아버지께 나아가기 주저될 때, 헨리 나우웬은 거침없고 친절하게 하나님 곁으로 이끌어준다. 이번에 읽은 책은 헨리 나우웬의 소책자 네 권을 한데 묶은 <영성에의 길>이다. 마지막 챕터 “자유의 길”은 헨리 나우웬이 크게 교통사고를 당해 죽음 직전에 갔던 경험을 나눈다. 이 책이 헨리 나우웬 소천 1년 후에 출판되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실제로 생애 마지막에 집필한 <아담>을 읽으며 헨리 나우웬의 마지막 모습을 상상해 보곤 했는데, 이렇게 죽음에 대해 명료하게 남겨놓은 게 있는 줄 몰랐다. 본향을 향한 설렘으로 가득한 책을 보며, 천국에서 아담과 함께 있을 헨리를 상상해보았다. 그리고 아주 후에 내가 라르쉬에서 만났던 아담의 형 마이크를 통해 아담과 헨리를 소개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건 얼마나 재밌고 신기한 일일까.

이번에 받은 뜻밖의 호의들이 있었다. 태백역에서 만난 예수원 가는 자매님이 처음 보는 내게 샌드위치 반쪽을 건넨 것, 매번 이방인들(?)을 받으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손님부, 휴대폰 확인이 필요해서 본의 아니게 매번 귀찮게 해 드린 손님부 담당분, 티룸에서 잔뜩 사온 강정을 모두에게 나눠주신 자매님. 이른 아침 태백역 가는 버스정류장에서 나와 다른 자매님을 태워주신 아저씨. 나누는 데 주저함 없는 사람들 마음이 부럽다. 작은 친절에 마음이 활짝 열린 시간을 내내 보냈다. 찬양예배 때 예수원 가족들의 특송이 주는 감동도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거동이 불편하신 예수원 가족 할머니가 축복송에 맞춰 아들과 귀엽게 춤 춘 것, 그 할머니가 아주 옛날 복음성가를 두 곡이나 특송하셨는데 거의 7절 되는 노래의 가사가 한 번도 막힘이 없었던 것(젊은 시절부터 얼마나 닳도록 그 노랠 불렀을 지 상상이 가는 부분), 너무너무 귀여운 두 어린 자매와 아빠가 부르던 찬양, 돌아가신 누군가를 기억하며 울먹이던 형제님이 아주 중후하고 멋진 목소리로 부른 ‘토기장이’... 되게 사랑스러운 순간이었다.

끝으로 이 말을 남기고 싶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사는 것... 거기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만, 그게 결국 우리의 소망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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