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어제.

winter_inspired 2020. 7. 11. 15:06

이번 사건은 기록으로 남기고 싶지도 않았다. 어제 힘들었고 도저히 갈피를 못잡을 줄 알았는데 몇자 끄적여 기억해두기로 한다.

좋은 기억들이 너무 나를 짓눌렀다. 대학교 때 그가 선거에 출마하게 된 것, 흩어져있던 진보 인사들이 당을 초월해서 다 나와 그를 지지했고, 그때 만든 캠페인송을 정말 백번은 들었나보다. 당선이 확정되었을 때 학교 복지관 앞에서 소리를 질렀다. 그 시절엔 이만큼 정치를 보면서 희망적인 때도 없었다. 나는 아름다운커피에서 알바를 하게 되어 좋았었고 그가 지지하는 모든 가치에 설렜고 그게 곧, 정말 한 때는 온전히 내 지향과도 같았다. 친구들이랑은 그가 쓴 책을 같이 읽었다. 당선 후 여러 실망스러운 것도 많았는데 내 기억은 대체로 여기에 머물러 있었다. 에어컨 없는 옥탑방에 사는 게 보여주기식이라고 욕도 많이 먹었는데, 그것도 참 그답고, 저런 식의 보여주기는 의미있다 생각했다. 당선 후 처음 한 일이 미화노동자와 야간 쓰레기 수거였으니. (그래, 그 후로도 그들의 주거와 노동 여건은 개선되지 않았어.) 그가 무슨 일을 해도, 맘에 안들고 비판할지언정 마음 속 기저에는 신뢰가 너무도 너무도 두터웠다.

어제는 배신감에 어찌할 줄 모르겠더라. 모든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는데 나는 아직 생생한 그 목소리, 웃음, 예전에 포럼에 참석했을 때 그가 나를 포함해 대학생들에게 악수를 청하던 소탈한 순간이 자꾸 떠올라 솔직히 힘들었다. 특유의 필체로 짧은 메시지를 남기고 산으로 갔다는 그 장면이 떠올라 괴로웠다. 하지만 안다. 나의 추억과 배신감은 피해자의 아픔에 비하면 한톨꺼리라는 걸. 권력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할까, 평생의 신념을 버리게 할만큼? 두 모습의 부조화가 믿기지 않아 멍해지고, 어제 친구와 얘기하면서 이 배신감에서 극복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예전의 모습을 묻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를 빨리 정신이 들게 한 건 피해자의 존재다. 엄연히 피해자가 존재함에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치들 때문이다. 이게 날 너무 화나게 했다. 사실 어제는 이 일로 가족과 한바탕 해서 마음이 좋지 않다. 그 순간에도 난 기도했다. 우리 가족이 부디 피해자의 편에 서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진보가 많은 가치에 공감해도 유독 성폭력에 관대한 이 부조리를 견딜 수 없다. 조문을 거부한 정의당 의원들께 참 감사하다. 심 대표도 애도를 표하고 피해자에 대해 언급한 것도 잘하셨다. 이걸 없는 일로 치부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그 존재를 드러내줘서 난 우리 당의 당원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피해자를 이상한 사람 만드는 시도에서 난 함께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어제 하루를 겪으며 내가 잠자코 닥칠 생각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는 게 그에 대한 내 마지막 신뢰다. 나를 포함 많은 사람들이 그를 젊은 사람들과 막역하게 소통하는 소탈한 리더로 기억했지만, 말년의 그는 오랫동안 이어진 제왕적 권력 중심에서 가해를 일삼으면서도 피해자에게 부끄럽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끝내 그가 부끄러워 했던 것은 온 천하에 그 민낯이 드러났을 때 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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