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하염없이 쏟아지던 어느날

winter_inspired 2023. 3. 15. 21:11

1. 어제 트레인에서 내리려는 찰나 챙겨왔던 샐러드를 쏟았다.
1-a. 그 샐러드는 렌틸 및 잡곡류라 팍 흩어졌다.
1-b. 난 허탈했지만 창피하지 않았다. 쪼그려서 손으로 주섬주섬 그러모아 치웠다. 누가 보든말든 (사실 잘 안 본다는 걸 알기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1-c. 한 정거장 전에 내리려던 거라 치우다가 결국 제 정거장에서 내렸다.

2. 샐러드 대용으로 마트에 들러 참치캔을 샀다. 하나를 집는데 두개가 딸려 나와 한 개가 땅에 떨어졌고 진열대 바닥 밑으로 절묘하게 쏙 들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2-a. 주울 수도 없게.

3. 방금 브리타 정수기에 얼마 안 남은 물을 따르다가 절반 넘게 쏟았다.
3-a. 컵에 물 따르는 것까지 쏟다니.

이것은 정녕 내 현재를 보여주는 기표인 것일까.

1‘. 학생 비자로 풀타임 근무가 다시 제한된다.
1’-a. 7월부터 최대 주 24시간. 그렇게 일해서는 여기 생활은 거의 불가하다.

2‘. 갑자기 이사갈 집에 좋지 않은 상황이 생겼고. 나는 또 새 집을 구해야 하는 상황.
2’-a. 소식을 듣자 시드니에서의 내 ‘위치’가 파악이 됐다.
2‘-b. 이제는 진짜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7월에 비행기표가 80만원 미만이다. 아마 그걸 타고 떠날 것 같다. 이전과 달리 마음이 많이, 거의 확실히 기울었다.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는

3. 관심 있던 독일인에게 다가갔지만 침묵의 거절을 당했다.
3’-a. 꽤 좋은 시간을 보냈고 친해진 줄 알았건만. 아무리 바빠도 이렇게 오래 답을 하지 않는 건 참 무례하다. 지금은 다가간 게 부끄럽고 후회스럽다.

번외.
애정하는, 마음이 통하는 한 언니에게 심난한 마음을 메시지로 보냈다. 그 언니의 아무 말이라도 내게 위로가 될 것 같아서. 아주 정성스레 온 답장을 방금 읽고, 그 감사한 마음을 기억하려고 급히 이 포스팅을 적은 것이다. 그 답장이 아니었다면, 오늘 오후, 저녁의 내가 한심스러웠을 것이다. 퇴근 후 밥 해먹고 한 짓이라곤 핸드폰 들고 노닥거리는 것 뿐이었으니까. 심난하면 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서. 언니의 답장에 눈물 핑 돌면서 드디어 숨을 크게 내쉬었다. 나의 고민을 절절히 들어주고, 날 알아주는 사람의 존재를 확인한 안도감이었달까.

이제 씻으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