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아낌 없이 주는 나무 🌳

winter_inspired 2023. 6. 13. 22:55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학급 문고”라고 해서 각자 집에 있는 책 한권을 가져와 교실에 비치를 해 두는 게 있었다. 나는 그때 내가 제일 아끼던 ‘아낌 없이 주는 나무’를 가져 갔다.

얼마 뒤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다. 옆 분단에 앞뒤로 앉은 서로 친한 여자애들 두 명이 그 책에 색칠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색칠하기 딱 좋게 생긴 그 일러스트 하나하나가 색연필로 난도질 당하고 있었다. 당장 걔네 손에서 그 책을 빼앗아 집으로 가져왔다. 색칠된 한장한장 볼 때마다 마음이 미어졌다. 그 뒤로 아끼는 책을 학급 문고를 위해 가져가는 일은 없었다.

내 것이 빼앗겨 주인이 누군지도 모른 채 누군가의 손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의 억울함은 어쩜 이리도 끔찍하면서도 익숙한지. 아무리 화나도 소리지르고 때리는 게 아니라, 그 소중한 걸 얼른 집어 들고 안전한 집에 보호하고픈 마음까지도 꽤 어린 시절에 배우는 가봐. 오늘 내가 쓴 글이 누군가의 이름으로 발행된 것을 알았을 때 그 익숙한 억울함이 내 안에 일었다. “제가 시스템에 액세스가 안 되어서 그런 가요?” 나름 용기 내 물어 봤을 때 내가 들은 대답은 “네 맞아요^^”. 그 순수한 해맑음에 화가 치밀어 저녁에 맛있는 걸 먹고 싶었다.

내맘대로 친정언니라고 부르고 싶은 언니가 일 끝나고 파스타 레슨을 해줬다. 오늘 배운 음식을 내가 혼자 해서 그 맛이 난다면 평생 소울푸드가 될지도 몰라. 레몬 제스트를 넣은 알리오올리오. 사진으로 과거를 추억하기 좋은 시대에 살고 있지만, 내가 기억하고 싶은 건 능숙하게 요리를 알려주는 언니의 목소리와 말투, 새콤한 파스타의 맛, 부드럽고 통통한 고양이 스노우를 쓰다듬는 감촉.

불쾌한 일을 차라리 피하고 싶어서 난 혼자 있는 게 편하다고 느끼는 걸까? 다행히 치유 역시 내가 피할 수 없는 자리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 언니 고마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