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남긴 것들
내 인생에서 역대급으로 잘 맞는 남자를 호주에서 만났다.
여러 번의 데이트는 꿈만 같았고 그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얼추 잘 맞을 거란 생각은 들었는데, 이렇게 좋은 사람이었다니! 게다가 알면 알수록 나와 잘 맞잖아? 아름다운 해변에서 그 사람과 만나던 시간은 꿈만 같았다고 밖에 표현이 안 된다.
하지만 그는 내게 커다란 트라우마를 남기고 떠났다.
만날 땐 그렇게 다정한데, 만나지 않을 때 차가웠던 사람. 함께 보낸 멋진 시간에 취해 헤롱거리던 내가 그 간극을 받아들일리 만무했다. 그는 결국 차가운 모습으로 끝을 알렸고, 나는 상처 투성이가 되어 이미 이사가 확정된 본다이에 왔다. 그 사람과 아주 눈부신 시간을 보냈던 그곳으로.
트라우마가 더 깊어질까 겁을 집어먹은 채 시작한 본다이 생활이었다. 그곳에 치유가 있을 거란 사실을 처음에는 몰랐지... 나에게 본다이는 온통 그 사람과의 추억이었으니까. 하지만 점점 그 공간 자체에 대한 내 애정이 쑥쑥 자라더니 상처를 이길 힘이 되어주었다. 그렇다고 지금 모든 게 극복이 되었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한국에 돌아와 느낀다. 오히려 나의 위로가 된 본다이에서 떠나 오며 그 아이에 대한 그리움도 다시 커져, 그저 상실감이 두 배가 된 것 같다. 해소되지 않는 마음을 어찌할 바 모르고 멍을 때리곤 한다.
- 달리기는 내게 완전한 pure joy가 되었고, 달리기 할 곳을 찾아 이사를 준비 중이다.
- 주중 비건식을 시작했다.
- 독일어 공부를 시작했다.
- 환경 쪽으로 이직했고, 지속가능 금융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 본다이 비치로 이사갈 수 있었다.
- 페일에일에 눈을 떴다.
- 레드핫칠리페퍼스를 듣는다.
이것은 트라우마 외에 그 사람이 내게 남긴 것들이다. 그저 내가 가고 싶던 방향성에 서 있는 그를 보고 홀딱 빠지지 않기란 불가능했겠지. 하지만 결국 그 사람과의 만남은 미적거리는 내가 원하는 길을 향해 걸어 갈 실행력을 높여주었다.